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 요리/역사 (문단 편집) == [[에도 시대]] 이전의 [[일본 요리]] == [[조몬 시대]]에는 [[도토리]]를 주식으로 먹는 경우가 많았으며 수시로 채집이나 사냥을 통해서 과일, 채소류나 고기 등을 먹어왔던 것으로 보인다. [[조몬 시대]] 후기 들면서 [[한반도]]와의 교역으로 상당수 잡곡을 도입하면서 부분적인 농경이 시작되었고, [[야요이 시대]]에 들어 보다 선진적인 농법이 전파되었다. 기원전 5세기 무렵에서부터 서기 7세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한반도와 중국 남부로부터 이민자들이 지속적으로 유입되면서 농경의 비중이 크게 높아졌다. 또한 이 시기에 많은 연맹국가들이 형성되었고 개중에서 야마토가 백제와 많은 교류를 했었기 때문에 [[한국 요리]]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왔던 것으로 보이며, 중국 남부 지역의 요리로부터도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한반도와 중국 남부의 요리가 전통 일본 요리와 혼합하면서 요리 기법이 발달해 왔던것으로 보인다. 675년에 [[덴무 덴노]]에 의해서 [[육식금지령]]이 시행되면서 한국 요리나 중국 요리와는 다른 방향으로 요리의 발달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이후로부터 [[일본인]]들은 고위층이라 할지라도 해산물과 채소 위주로 된 식사를 했고 평범한 사람들도 잡곡과 국, 채소, 해산물을 먹었다. 다만, 지역적으로 육식 금지령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류큐 왕국, 도호쿠와 홋카이도 일대의 아이누족들은 목축과 수렵으로 육류를 섭취했고, 직업적으로는 사냥꾼들이 들짐승을 약용으로 먹었다. 또한 일부 사람들은 오리는 새, 토끼는 원래 물고기였다는 이유를 들어가며 고기를 취했다. 이랬기 때문에 육식 금지령으로 일본이 완전한 채식주의 사회가 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리고 무사들이 일본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되면서 육식 금지령도 점차 약화되어 갔다. 실질강건을 중시하고 활동량이 엄청난 무사들이 채식만으로 열량을 확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에 육식도 허용되기 시작하고 사냥 문화도 다시 부활했다. 헤이안 시대 이후로 선종이 유입되면서 사찰 요리도 널리 전파되었다. 일본의 사찰 요리는 두부, 차, 점심, 과자 등 다양한 음식과 식문화에 영향을 미쳤고, 중국을 통해서 유입된 국수 요리는 [[우동]]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전국 시대에 서양과의 교류가 활성화된 뒤부터는 서양의 육류 요리와 카스테라, 사탕이 유입되어 일본에 확산되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인해 전국 시대에는 이전보다 육류 섭취량이 좀 더 많은 편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